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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위원회 새소식

제주4.3기행 잘 다녀왔습니다

by대전세종충남지역위원회 · 2025.03.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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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_제주 4.3기행]

- 아래 내용은 제주4.3기행 참가자분의 후기입니다.


2년 전부터 벼르던 제주4.3 기행을 3월에 노무현재단 대전세종충남지역위원회와 다녀왔다. 1948년 12월 19일(음력) 400여명이 집단학살을 당한 북촌마을 출신 이상언 문화해설사(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대표)의 담담한 어조의 안내가 더 무겁게 아프고 다가왔다.

 

몰랐었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에서 일본의 순사가 이름만 바꾼 군정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해 여섯 명이 사망한 것이 4.3의 시작이었음을… 1954년까지 7년을 이어진 광기가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여명을 죽인 것을… 몰랐었다. 가까운 대전의 골령골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일명 예비검속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관도 없이 묻힌 곳이란 것을… 4.3을 너무 몰랐었다. 

 

제주 사람들은 그저 남북한 단일 정부를 원했을 뿐이었다. 한 나라로 살아오던 한민족이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꿈. 이승만 정부 수립을 위해 그 꿈을 가진 이웃들을 빨갱이라 명명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놀이하듯 7년 간 학살하고 그 피해자의 후손들을 연좌제란 이름으로 묶어 지금까지 차별하고 억압한 처참한 역사가 4.3이었다.

 

제주여행의 관문인 제주공항이 400명 이상의 유해가 발굴된 학살터였고 친구들과 아름다운 바다색에 감탄해 해산물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함덕 바닷가 인근의 북촌마을은 400여명이 희생되고도 추모조차 군정에 의해 강제로 하지 못하게 된 주민들이 표정까지 잃은 마을이었다. 제주 어르신들의 아무 감정 없는 듯한 표정에 ‘무뚝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무지했던 나.  그들은 북촌마을 너븐숭이 애기무덤 앞에 작은 인형을 놓고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터에 고무신을 가지런히 올리는 것 외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희생자들이었음을 이제서야 안다.

  

섯알오름 학살의 생존자이자 유족인 91세 양신하 어르신의 증언은 또렷했다. 교사 학자 등 마을의 지식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을 반정부 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트럭에 태워 끌고가 총살했고 가족들이 시신수습도 하지 못하게 접근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참혹했다.그 모든 상황을 마치 어제 일처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묘사하는 어르신의 삶의 이유는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일제에 의해 알뜨르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징용희생자가 군정에 의해 학살희생자로 바뀐 처참한 역사가 그 아름다운 송악산 자락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섬 하나가 몬딱 감옥이었주마씸.

섬 하나가 몬딱 죽음이었주마씸”

문충성 시 ‘섬 하나가’ 묘사한 그대로 거기 놓여있었다.

 

제주 4.3에 대한 첫 위령제는 1989년 46주기 만에 처음으로 치뤄졌다. 추모가 죄가 되지 않는데 무려 42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정부의 공식사과는 17년의 시간이 더 지난 2006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주에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4.3 학살의 역사는 미군정의 계엄령과 포고령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부역자들이 다시 군정의 부역자가 되면서 ‘초토화’, ‘척결’이란 단어는 살인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그 처참한 역사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란 이름으로 부활했고 아직 진행 중이다. 이 역사가 바로 서는 날 제주4.3 평화공원의 아무것도 쓰지 못한 하얀 비석 백비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ㅇ 3월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처 제주 4.3평화공원과 북촌마을, 섯알오름, 잃어버린 마을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발길 닿는 모든 곳이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 서려있어 이젠 이전과 같은 눈으로 제주를 여행할 순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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