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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활동 참여 후기

독도실록1905 를 읽고

by 김경옥 2026.05.15 조회수3

? 독도실록1905 /예영준/ 책밭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1910년 한일 합방 이전인 1905년에 일본이 점유했기에 독도는 식민지 영토 반환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주일 특파원을 지낸 작가는 

그럼 1905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일본은 독도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 점유는 합당한가에 대해 

여러 자료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1부는 독도 어업권을 독점하고자 했던 

나카이 요자부로란 인물을 중심으로

독도를 둘러싼 조.일 양국간 역사적 자료를 살펴본다.

2부는 야마자 엔지로라는 인물과

일본내 대륙팽창주의 노선, 독도 점유와의 연관성을 1905년을 전후해서 살펴본다.

나카이의 독도 어업권 주장은 

일본 내무성에서도 독도는 조선 영토임을 명시한

1877 년 태정관 자료를 들어 반대했다. 

하지만 외무국장인 야마자 엔지로를 만나면서 

독도는 어업권 뿐아니라 군사상 요충지로 편입된다

.

야마자라는 인물은 하급무사 집안 출신으로

1868년 메이지유신의 중심 권력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학연, 지연으로 연결되며 

젊은 나이에 '대륙팽창주의' '개전론파'의 중심인물로 

급성장한다. 

 

1892년 부산주재 총영사관에 첫 부임한 후 

경부철도 비밀측정을 시작으로 

러일전쟁의 완수와 을사늑약까지 

야마자는 주도적 역할을 한다. 

특히,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한 세력들이 '대륙 낭인' '조선낭인' 으로 활동하며 만든 단체들,

현양사ㅡ천우협ㅡ흑룡회ㅡ호월회 ㅡ일진회 등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비밀공작과 정보 취득을 하고, 

이를 외교 업무에 적극 이용한다.

(흑룡회는 오늘 날 일본 우익의 뿌리라고 한다)

 

대륙팽창주의, 중국까지 점령하겠다는 

이들 개전파(開戰派)의 야심은 

1902년 영일동맹을 이루어내고 , 

이어서 1905년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이 과정에서 독도는 해저전선과 망루를 설지 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군사 요충지가 되는 것이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정서적으로도 우리나라 영토가 맞다. 하지만 일본이 '대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며 제국주의로 나아갈 때 조선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사실 독도라는 명칭도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전에는 통일된 이름조차 없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불리웠다. 

조선은 울릉도를 오랜 세월 '공도정책'을 펴서 

되도록 비우게 했고, 

독도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1905년 러일전쟁은 일본이 대륙 팽창주의로 나아가는 

첫 시발점이었고,

그렇게 독도는 일본 군사기지로 편입된 것이다.

그 과정에 나카이 어부의 욕망과 

야마자 엔지로의 대륙 팽창주의 야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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